
나는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을까?
천주교가 유입된 조선은 절망과 희망이 뒤엉킨 세상이었다. 신분제의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고 어진왕이 왕좌에 올랐지만 태평성대를 바랄 순 없었다. 내부로부터 오랜 시간 썩어 부패된 조선 사회의 골병은 한 순간의 씻김으로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조선사회에 천주교가 유입됐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겠지만, 조선 왕족을 비롯하여 유교 질서로 확립된 자신들의 권위를 양반들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 '흑산'은 조선 정조대왕 사후 정씨 일가의 모습, 천주교로 인해 핍박받아야 했던 민중들과 정약용과 그의 형 정도전, 그들의 조카 사위 황사영이 순교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음, 이렇게 리뷰를 쓰기 전에 영화 '자선어보'를 한 번 봤으면 좋았을텐데, 급한 마음에 영화를 보기 전 그냥 책에 대한 이야기를 몇 글자 써보려 한다. 그 당시 사회적 배경 등과 관련한 역사 이야기를 깊게 하지는 않으련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책인데 역사 공부를 해야하고 또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고 파고 들어야 하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저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고 새로운 신앙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었지만 죽음 앞에서 다시 선택을 해야만 했던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이것이 이 책 '흑산'을 읽는 이유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그래도 '만약’, 정약용 가문이 천주교 사태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의 형제인 정약종은 목숨을 건지고 소설 속 주인공 정도전은 흑산으로 유배가는 일이 없었을 것이며, 그들의 조카사위 황사영도 순교하는 일이 없었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다가온 시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할 것이다. 그들의 소신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은 죽거나 사라져야 할 정치적 정적이었기에 아마도 무난히 정치 생명을 이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으로 시작한 궁금증이 '그렇다면'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그들이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면 인간의 삶은 '운명’이라는 틀에 맞춰져 결국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누군가는 자신의 '운명' 앞에 찾아온 위기에 죽음을 선택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의지를 반하고 배교를 선택하며 부질없이 목숨을 이어간다. 부질없다는 표현은 취소해야겠다. 나는 천주교인도 아닐뿐더러 종교에 대한 의지를 반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소설 속 '흑산’에서 종교와 신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그들의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가, 그저 그들은 그들의 운명을 따르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가치를 다르게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죽음 앞에 삶의 가치가 가지는 무게는 각각 다른 것인지, 그들은 그 세상 속에서 각자 다른 판단으로 운명을 결정한다. 결국 운명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며 그들이 내어놓은 생명의 가치는 또다시 후세의 많은 각자들에 의해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사학죄인으로 몰린 정씨 일가, 그 중 큰 형인 정도전은 흑산이라는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야만 도착할 수 있는 섬으로 유배를 간다. 유배지로 향하는 그의 모습과 섬에 도착해 운명을 순응하는 그의 모습에서 애처로움이 전해진다. 그는 받아들였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가 살아가고 발붙이던 육지와 고향의 남한강을 상상하며 아련한 추억들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삶과 운명을 받아들였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또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하고 아이를 낳으며 그렇게 '흑산’이라는 섬에 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명까지도 유배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함께 유배를 떠난 형제 정약용과 조카 사위 황사영이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상상했다. 감히 소설을 읽으며 실제 정약전, 그들의 가문은 당시 어떤 상황이었을까 상상해본다. 저자 김훈은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며 운명에 순응하는 정약전의 감정 노출을 최대한 절제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도록 문장을 이끌어간다.


독서와 함께 글 속의 세상을 직접 두발로 마주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독서이다. 책은 앉아서 떠나는 여행, 여행은 두발로 걷는 독서라고 하지 않았던가? 실제 남양주에 위치한 정약용 형제들이 머물렀던 남한강변 근처의 생가도 방문해봤고, 2019년 국토대장정을 할 때 강진에서 해남으로 향하는 길에 다산초당까지 걸어서 방문하기도 했었다. 아쉽지만 당시 다산초당에서 영화 '자산어보'를 촬영중이어서 입구에서 발걸음을 돌려야했지만. 아무튼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머물던 그들의 생각와 남한강변이 굉장히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런 모습을 직접 눈에 담아두었기에 좀 더 가감히 소설 속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작품 속에 빠져들 수 있었다. 만약 이 소설을 읽는다면 시간을 내서 꼭 정약용 형제들의 생가와 근처 남한강변을 돌아보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나는 언제쯤 흑산을 실제 방문해볼 수 있을까?
오랜만에 김훈 작가의 소설에 푹 빠져들었다. 이 작품은 오래전 종이책으로 읽었는데 최근 전자책으로도 출간된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읽게 되었다. '칼의노래’에서 펼쳐지는 전장의 긴박함과 이순신 장군이 감당해야 했을 전장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맞설 수 없는 현실에서 찾아오는 죽음 앞에 순응하고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등장인물들의 애절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책태기가 찾아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역시나 독자들로 하여금 책 속의 세상에 깊이 끌어들이는 스토리와 문장으로 즐거운 독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김훈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 몇 없을 것이다. 혹 아직 안읽었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또 김훈 작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입문용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다.
‘운명’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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